오랫동안 스코트와 나는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호기심이 있었고 죽음이 어떤 것일지 큰 기대를 가져왔는데, 이제 스코트가 삶의 마지막에 점점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 많은 시간을 들여 얘기하고 책을 읽었다.
우리집 서재에는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에 관한 책이 수십권 있었는데, 거기에는 오래전에 우리 아버지가 갖고 있었던 책도 있다.(그 가운데 희귀본으로 유명한 프랑스 천문학자 카미유 클라마리옹이 쓴 세 권짜리 책, , , 가 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삶의 연속성과 의식이 어어짐을 믿었다.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믿는 더 많은 만남과 기회를 간절히 바랐다. 우리는 죽음이란 종말이 아니라 옮겨감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삶의 두 영역 사이에 있는 출입구였다. 이 문제에 관해,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온 불가지론자 로저 볼드윈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코트는 이렇게 썼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변화지.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게, 언제나 다시 또 다른 날로 이어지지. 두 번 다시 같은 날이 오지 않지만 오늘이 가면 또 내일이 오네.
사람의 몸뚱이는 생명력이 빠져나가면서 먼지로 바뀌지만, 다른 모습을 띤 삶이 그 생명력을 받아 이어진다네.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변화는 우리 몸으로 보아서는 끝이지만, 같은 생명력이 더 높은 단계에 접어드는 시작이라고 볼 수 있지.
나는 어떤 식으로든 되살아남 또는 이어짐을 믿네. 우리 삶은 그렇게 계속되는 것이네."
스코트는 오랫동안 스스로 의도하고 목적이 있는 죽음에 대해 얘기해 왔다. 그이는 자신이 완전히 무능력자가 되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려고 했다. 요양소에서 두려움에 떨며 오랜 시간에 걸쳐 죽어가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았다.
"왜 우리가 마지막 날과 죽음을 그렇게 소란스럽게 만들어야 할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쾌적하고 낯익은 환경 속에서 조용하고 조화롭게 사라지는 대신에, 우리는 비싼 돈을 들여 우리가 사랑해온 이들을 병원이나 요양소로 보내어, 그 과정을 편안하게 돕기보다는 자연스럽지 못한 수단으로 막으려는 낯선 사람들에게 맡긴다.
우리는 불편함 속에서 울음으로 인생을 시작하지만, 떠날 때는 적어도 어느 만큼 우리의 목표를 이룬 가운데 위엄과 완전함을 지닌 채 갈 수 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가 지향해서 일해온 우리 삶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과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허친슨(A.S.M. Hutchinson)이 1925년에 쓴 소설 에서 묘사한 주인공처럼 스코트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안이 잘 정돈된 문가에 서서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저녁을 맞이하는 남자의 면모' 를 지니고 있었다.
스코트는 자기 힘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가고 싶어했다. 그이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가기를 원했고, 의식을 갖고 또 의도한 대로, 죽음을 선택하고 그 과정에 협조하면서 죽음과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그이는 죽음의 경험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기꺼이 그리고 편안하게 몸을 버리는 기술을 배우고 실천하기를 기대했다. 죽음으로서 그 자신을 완성할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사는지 배워왔는데 이제 어떻게 죽는지 배우고자 했다.
노자는 "생명이 열매를 맺고, 떨어지게 하라." 고 말했다. 스코트는 삶은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되었으니, 이제 가도록 놓아둘 준비가 되었다.